김재동 목사의 신앙칼럼



성육신의 의미

(지난 2018. 12. 2일 워싱턴지역교회협의회가 주최한 성탄축하예배에서 아주 간략하게 전했던 설교에 내용을 조금 보강한 것입니다)

성육신(Incarnation)이란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사건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1:14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말씀’은 로고스(Logos)인데, 일반적인 의미의 말씀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오늘은 ‘성육신의 의미’에 대하여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1. 성육신은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된 사건입니다.
지난 칼럼 ‘성경의 권위’에서도 말씀드린 바 있지만, 예언의 성취는 성경의 권위를 입증해주는 매우 중요한 변증자료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이사야 7:14에서는 예수님이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실 것이 예언돼 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리고 예수님은 다윗의 동네인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실 것이라고 미가 선지자가 미가 5:2에 예언해놓았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이 예언은 얼핏 다윗 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다윗의 근본은 상고나 태초가 아니기 때문에 다윗에 대한 예언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예언이 성취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은 배후에서 세밀하게 역사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장에 보면,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로마 판도에 속한 모든 나라에 호적을 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로마의 통치 아래 있던 이스라엘 모든 국민들도 호적하러 각각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호적은 자기 본적지에 가서 하도록 되어있었고, 예수님의 부모는 다윗 지파였기 때문에 다윗의 동네인 베들레헴으로 호적을 하러 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마리아는 만삭이어서 언제 출산을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경우 반드시 본적지에 가서 호적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예외규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마음에서 그렇게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마리아는 기어이 남편을 따라 그 멀고 험한 길을 떠라 나서게 됩니다. 어렵사리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산기가 있어 당장에라도 출산을 해야 하는데 모든 숙소는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이미 만원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마구간에서 출산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만에 하나 마리아가 도중에서 출산을 했더라면 하나님의 예언은 부도가 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언은 하나도 어김없이 100% 성취되어야만 합니다. 만일 하나라도 어긋나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의 예언이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하나님의 예언이 얼마나 정확하게 이루어지는지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성육신은 기독교가 계시의 종교임을 보여줍니다.
이 세상에 많은 종교가 있지만 대부분의 종교는 인간이 신(神)을 찾아가는 종교입니다. 가령 불교를 예로 든다면, 불교는 인간이 자기 자신의 수양을 통해 득도(得道)하여 열반의 경지에 이르고 부처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즉 인간의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가르치는 자력종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 스스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구원이 주어진다고 가르치는 타력종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친히 우리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 세상에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니셔티브(initiative)를 가지고 친히 우리 인간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을 사랑하셔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이것이 곧 성육신 사건입니다. 히브리서 1:1-2을 보면,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해 다양한 모습과 형태로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의 마지막 계시인 동시에 계시의 정점(climax)이라는 뜻입니다.

3. 성육신은 하나님의 낮아지심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비록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지만 동시에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하나님을) 나타내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은 성경에서 누누이 언급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14: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구절은 이사야 9:6입니다. 아기가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빌립보서 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자신을 비워 종의 신분을 취하여 피조물인 사람들과 같이 되셨으며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눈높이로 낮아지셨습니다. 우리는 보통 십자가의 고통만을 말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인간의 사이즈로 작아진다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은 없을 것입니다. 인도의 요기들이 작은 통 속에 자기의 몸을 접고 비틀어 구겨 넣는 것을 볼 때마다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하나님이 인간의 크기로 자신을 축소시킨다는 것은 이에 비할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이었을 게 분명합니다. 이렇게 겸비해진다는 것은 반드시 고통이 수반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자신을 죽여야 하는 지난(至難)한 과정이 수반되기 때문입니다.

4. 성육신은 예수님이 우리의 중보자가 되심을 의미합니다.
(디모데전서 2:5) “하나임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라.”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의 중보자(Mediator) 역할을 감당하시기 위해 하나님이지만 인간의 육을 입고 오신 God-Man이십니다. 예수님은 반신반인(半神半人)이 아니라, 완전한 하나님이며 완전한 인간이십니다(True God, True Man). 그래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중보자 역할을 감당하실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이 대제사장이 되심을 강조하고 있는데, 제사장은 라틴어로 '폰티펙스(pontifex)' 즉 '다리를 놓는 사람'(bridge builder)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끊어진 다리를 놓아주신 중보자이십니다.
(히브리서 2:14-15)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은 놓아주려 하심이니”
예수님은 우리 인간과 꼭 같이 혈육을 입고 이 땅에 사셨습니다. 한 가지 다른 점은 죄가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죄가 있으신 분이라면 우리 죄를 대속하실 자격이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인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그 분에게 전가하여(transfer)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담당케 하신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육신이 없으신 분이었다면 십자가의 죽음도 없었을 것이요, 따라서 우리를 위한 대속(代贖)도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중보자로서 한 손은 하나님의 손을 잡고 한 손은 인간의 손을 잡아 죄로 말미암아 서로 원수가 된 불화한 관계를 화목케 하셨습니다. ‘화목’(Reconciliation)이라는 단어가 구원을 뜻하는 또 다른 신학용어로 사용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5. 성육신은 임마누엘의 사건입니다.



(이사야 7:14)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예수님이 오시기 약 8세기 전에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장차 오실 예수님의 이름이 임마누엘(Immanuel)이 될 것임을 예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구약시대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장막에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임재하셨습니다. 이것을 히브리어로 ‘쉐키나’(Shekinah)라고 하는데, ‘거한다’(dwell)는 말이 바로 ‘쉐키나’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 인간 가운데 거주하신다는 것, 이것이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단순히 공간적으로만 같은 장소에 머무르신다는 의미를 넘어 우리 삶의 크고 작은 모든 일에 관여하시고 우리의 영육간의 필요를 채워주시며 우리의 인도자와 보호자가 되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임마누엘의 신앙으로 무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 자신이 임마누엘 신앙을 가지고 어려움을 극복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이 뿔뿔이 흩어질 때 주님은 제자들에게 임마누엘의 신앙을 보여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6: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주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직전 땅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지상위임명령을 주실 때 임마누엘의 약속으로 제자들을 격려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8:20)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오늘 성육신의 의미를 간략하게 상고해보았습니다. 우리 모두 성탄절기에 성육신의 의미를 잘 깨닫고 주님의 오심을 깊이 묵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성탄절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Christmas는 그리스도(Christ) 예배(mass)입니다. 예수님 없는 X-mas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Jesus is the reason for the season.” 성탄절 카드에 자주 등장하는 이 문구를 음미하면서 진정 ‘즐거운’ 성탄절을 맞으시길 소원합니다. Merry Christm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