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동 원로목사의 신앙칼럼] 인생의 결산

이제 며칠만 지나면 금년 한 해도 저물게 됩니다. 우리는 한 단위의 시간이 지날 때마다 결산을 하는 것이 거의 몸에 배다시피 되어 있습니다. 매일 일일결산을 하고, 매주 주말결산을 합니다. 한 달이 지나면 월말결산을 하고, 한 해가 지나면 연말결산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한 해 한 해 쌓이다 보면 언젠가는 우리의 일생이 다하고, 그러면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결산하는 날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지혜로운 자라면 우리는 인생의 종말을 예견하면서 그 종말에 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미국 사람들이 잘 하는 죠크 중에 이런 죠크가 있지 않습니까? “미국 시민이라면 두 가지 피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하나는 죽음이고 하나는 세금이다.” 이 죠크는 물론 미국에서는 세금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죽음의 불가피성을 말해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히브리서 9:27은 “한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하나님의 불변의 법칙입니다. 그런데도 미련한 자들은 하나님의 법칙을 거스르려는 시도를 하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중국을 처음으로 통일하고 진나라를 세운 진시황(秦始皇)입니다. 그는 자신이 지금 누리고 있는 엄청난 영화를 계속 누리고 싶은 욕심에 어마어마한 아방궁을 짓고, 불로장생의 불로초를 캐러 서목이라는 사람을 제주도로 보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주도에는 이것을 기념하는 ‘서목 기념관’이 세워져 있습니다. 서목이 끝내 불로초를 구하지 못하고 빈 손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도 있고 불로초를 구하지 못하자 아예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귀포(西歸浦)라는 지명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편 진시황은 수은을 먹으면 오래 산다는 의관들의 권고를 따라 수은을 상복하다가 마침내 수은 중독으로 요절했다고 하니 얼마나 미련한 자입니까.

인간은 누구나 죽습니다. 그래서 항상 종말에 대비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 지혜로운 삶이라고 전도서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도서 7:2,4)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留心)하리로다…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은데 그 이유는 우리 인간은 누구나 결국은 죽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명심하면서 아직 목숨이 붙어있는 동안에 다른 사람의 죽음을 보면서 자신의 죽음을 생각할 수 있는 자가 지혜로운 자라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한순간의 즐거움만을 생각하지만 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죽음의 순간을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터부시합니다. 오죽하면 한국에서는 아파트나 호텔에서도 4층을 건너뛰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4라는 숫자가 죽을 ‘사’(死) 자를 연상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살아있다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듯이 장차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것도 엄연한 현실임을 항시 잊지 말아야 합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의미의 라틴어입니다. 옛날 로마에서는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장군이 시가행진을 할 때 노예를 시켜 큰 소리로 이 말을 외치게 했다고 합니다.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너무 우쭐대지 말라. 오늘은 개선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니 겸손하게 행동하라.”고 일깨워주기 위해 생겨난 풍습이라고 합니다. 미국의 나바호 인디언들에게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네가 세상에 태어날 때 너는 울었지만 세상은 기뻐했으니, 네가 죽을 때에는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라.”

누가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은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통해 우리 인생에는 반드시 결산할 날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옛날에 청지기는 매우 다양한 일을 했지만 가장 중요한 업무는 주인의 재산을 맡아 관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비유에서 멀리 나들이를 하고 있던 주인은 청지기가 자기 재산을 허비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해고통지를 합니다.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더 이상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네가 한 일에 대하여 결산서(account)를 제출하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도 언젠가는 우리 인생의 결산서를 제출하도록 요구하실 것입니다. 인생의 대차대조표(balance sheet)를 보여달라고 요구하실 때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우리는 그 때를 대비해야 합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청지기는 부정을 저지른 ‘불의한’ 청지기였지만 주인에게 칭찬을 듣습니다. 윤리적인 관점에서만 본다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부정을 저지른 자를 보고 일을 지혜롭게 처리했다고 하니 얼른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그러면 왜 이 청지기가 칭찬을 들었을까요? 지혜롭게 처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부정을 저지른 것이 지혜로운 처사란 말입니까? 물론 아니죠. 그가 지혜롭다는 칭찬을 들은 이유는 딱 한 가지, 미래에 대비할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해고통지를 받은 청지기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고심하던 중 문뜩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다 불러들입니다. 그리고 마치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 제 멋대로 빚을 탕감해 줍니다. 아주 기분 좋게 선심을 쓴 것이죠. 기름 100말 빚진 자는 50말 빚졌다고 고쳐 쓰게 하고, 밀 백석 빚진 자는 팔십 석 빚진 것으로 고쳐 쓰게 합니다. 주인의 입장에서는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죠. 그런데도 주인이 혼자 가만히 생각해 보니 넘어질 때를 대비해서 자기가 누울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잔꾀를 부리는 이 청지기에게서 한 가지 기특한 점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 비유를 베푸신 후 주님은 친히 이 비유의 의도를 해석해주셨습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 세상 사람들도 자기의 미래를 준비하는 일에 있어서 이렇게 약삭빠른데 정작 하나님을 믿는 빛의 자녀들은 도대체 뭘 하고 있느냐는 책망조의 뉘앙스를 풍기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준비를 하면 염려할 게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를 대비해야 후탈이 없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9:27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육신적인 죽음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개인적인 종말 이후에 우주적인 종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이 세상 역사에 마침표를 찍으시는 이른바 ‘오메가 포인트’가 있습니다. 이 종말의 때에 모든 인간은 최후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장차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구원을 받게 되며 영원한 천국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첫 관문입니다. 반드시 이 관문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영원한 상급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일단 천국에 들어간다고 해도 거기에서 우리가 영원토록 누릴 상급에는 차등이 있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혹 어떤 분들은 천국에 가면 모든 게 평등해야지 천국에 가서도 차등이 있다면 이 세상과 하등 다를 게 없지 않느냐고 반론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얼핏 그럴싸하게 들리는 반론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우리가 골백번 죽어다 깨어나도 스스로는 할 수 없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아무런 조건 없이 모든 믿는 자에게 은혜로 거저 선물로 주셨지만 상급은 다른 차원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받은 후에 온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섬긴 자와 그냥 적당히 하나님을 섬긴 자가 똑같은 대우를 받는다면 그것은 공정한 처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어긋나는 처사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러 군데서 우리가 누릴 상급에 차등이 있음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에서 집 짓는 비유를 통해 이 영적 진리를 아주 선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집을 짓는데, 어떤 사람들은 금, 은, 보석으로 집을 짓고, 어떤 사람들은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짓지만 그 집의 공력(功力)을 시험할 때가 오는데 불을 붙여보아 훅 타버리면 상을 받지 못하고 불에 타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어야 상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비유이기 때문에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지만, 이 말씀이 주는 메시지는 너무나 명확합니다. 다 같이 예수를 믿어도 어떻게 인생의 집을 짓느냐에 따라 상급이 다르게 정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감정사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집을 감정해 보시면 그 값이 천차만별일 것입니다. 우리 인생을 최종적으로 평가하실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평가하실 때 인정받을 수 있는 양질의 인생(quality life)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마태복음 16:27에서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하셨고, 또 요한계시록 22:12에서도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각자가 ‘행한 대로’ 그리고 ‘일한 대로’ 갚아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후서 5:10에서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게” 될 것임을 밝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신자와 불신자를 가리는 ‘백보좌 심판’(요한계시록 20장)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믿는 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상급심판에 관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영원을 어디에서 보낼 것인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 영원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은 영원을 어디에서 보낼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해답을 얻은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영원을 어떻게 보낼까에 늘 관심을 가지고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해 중단없이 매진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을 본받아 단 한 번밖에 없는 ‘일생’(一生)을 믿음으로 성실하게 살아 인생 만년에 “이제 나를 위해 의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노라.“고 담담하게 고백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