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이순신 글쓰기 대회] 최우수상에 고경연 학생(태국 치앙마이 한국학교)

이순신 미주교육본부는 전세계 한국학교 학생들과 한인 2세들에게 겨레의 큰 스승이신 이순신 장군의 인성과 리더십을 함양하며, 장군님의 삶과 사상이 담긴 5대 정신인 ‘나라를 사랑하는 정신’, ‘정의를 실천하는 정신’, ‘책임을 완수하는 정신’, ‘창의성을 발휘하는 개척정신’, ‘희생을 감내하며 헌신하는 정신’ 의 교육과 함께,정체성을 바르게 지녀 개인과 사회, 국가를 위해 해외 미국 내 주류 사회를 이끄는 인재로 육성하는 것과 전 세계에 이순신 장군의 참모습을 알려 대한민국의 국격을 높이는 등 민간외교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창립되었다.

이순신 미주교육본부(이사장 김대영)가 실시한 제2회 충무공 이순신 글쓰기 대회에서 태국 치앙마이 한국학교의 고경연 학생(11학년)이 최우수상인 거북상을 수상하였다.카일라 게이츠 (3학년)이 옥포상, 임주아 학생 (5학년)이 한산상, 최수정 학생 (9학년)이 한산상의 각각 금상을 차지 하였다.

고경연 학생은 “아주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따라 한국을 떠나 태국 북부에 있는 작은 도시 치앙마이에 오게 되었고 다행스럽게도 한글학교가 있어서 우리말, 우리글을 배울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갖게 되었으며; 늘 사명감을 가지고 가르쳐 주시는 여러 선생님들 덕분에 읽기와 쓰기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역사의 기초를 배울 수 있었다. 모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자신의 신념을 믿고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간 이순신 장군의 모습을 본 받아서 지금보다 더 나은 제가 되도록 노력하고 싶다”고 수상 소감을 전했다.

105여명의 학생이 1차 심사를 통과하였고, 현직 한글학교 교사를 포함 15명의 심사위원들이 각 분야별로 3-5명으로 팀을 이루어 부문별 심사를 하기 위해 3번의 모임을 하였으며 모든 수상자들은 전화 인터뷰 점수를 합산하여 최종 수상이 결정되었다.

김대영 이사장은 “이순신 장군의 정신을 재외동포 차세대와 함께 나누며 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해 공감하기 위해 시작하였는데, 아이들의 작품을 통해 아이들의 생각을 읽게 되고 공감하게 되면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면서 “앞으로 많은 학교의 학생들이 이순신 장군을 통한 인성, 정체성 교육을 완성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하였다.

이순신 미주교육본부는 2004년부터 미주교육 경험을 바탕으로, 세계 각지의 한국계 학생들이 <이순신 정신 인성>을 배우고 본 받아 해외 라는 특수한 환경 속에서도 한국인의 정체성을 바르고 높이 자라도록 이순신 교육자료 (www.yisunsinworld.com)를 7개 언어로 안내하고 있다. 아울러, 이웃 현지 외국인들에게 우리 한국인의 자랑인 이순신 장군 (Admiral Yi Sun-Sin)을 손쉽게 소개할 수 있도록 다양한 사업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한산대첩기념사업회의 후원으로 최우수상을 수상한 학생은 이순신 기념 축제 참여를 위해 한국을 방문하여 더 깊은 교류와 교감을 만들어 나가게 된다.

다음은 이번 최우수상인 거북상을 수상한 고경연 학생(11학년)의 작품내용이다.

저는 여태까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라고 하면 임진왜란이라는 7년의 긴 시간 동안 조선을 지킨 훌륭한 분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이번에 관련된 자료들을 접하면서 왜 우리가 이순신 장군에 대해 배우고 그 분을 본받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본인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어떻게 하는 것이 더 많은 국민을 이롭게 하는 것인가?’ 라는 질문을 하시고 생각한 답을 평생에 걸쳐 몸소 실천하신 이순신 장군은 성웅이라는 칭호가 전혀 아깝지 않은 우리나라의 역사상 최고의 장군일 뿐만 아니라 최고의 스승이라고 생각합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역사적인 업적은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일본이 쳐들어 올 것을 염려하여 거북선을 발명했고, 판옥선과 화포를 수리했으며, 장병들을 체계적으로 훈련시켰습니다. 장기간 전쟁을 치르는 동안에는 국가의 지원 없이 식량과 무기를 자급자족했습니다. 조선의 지리와 무기에 맞는 전략을 세워 수십 회의 전투를 모두 승리로 이끌면서 아군과 백성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와중에도 피난민들을 가엾게 여겨 그들을 수용하고 생계대책을 세워주기까지 하신 분입니다. 이 모든 사실을 후세의 우리가 알 수 있는 이유는 이순신 장군이 전쟁기간 내내 있었던 일들을 기록으로 빠짐없이 남겨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남다른 부지런함과 맡은 일을 성실하게 처리하는 공명정대한 마음,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정신, 그리고 나라에 충성하는 애국심이 장군의 삶에 모두에 녹아 있었습니다.

만약 이순신 장군이 계시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동아시아 삼국(한국, 중국, 일본)의 역사는 크게 바뀌었을 것입니다. 그 분의 살신성인 정신이 제가 알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재를 만들어 주셨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존경의 마음이 우러나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순신 장군에 대해 제대로 알고 이순신 장군이 우리에게 주신 교훈을 본받아 더 나은 민족이 되어 세계를 이끌어 나가는 중심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이순신 장군을 기념해야 할 날을 꼽는다면 탄신일(봄), 한산도 대첩일(여름), 명량 대첩일(가을), 그리고 순국일(겨울)을 말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이순신 장군의 탄신일은 1545년 4월 28일(음력 3월 8일)입니다. 정부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지극한 애국심을 기리고, 자주적인 민족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탄신일을 국가 기념일로 지정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한성부 건천동(서울 중구 인현동)에서 태어나셨는데 현재 그곳에는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라는 표식이 남아 있습니다. 매년 이순신 장군의 탄신일에는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을 보낸 아산에 위치한 현충사에서 탄신제례와 기념행사가 열립니다.

두 번째, 한산도대첩 기념일은 1592년 8월 14일(음력 7월 8일)입니다. 한산도대첩은 진주대첩, 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첩으로 불리는 큰 전투인데, 한산도 해전과 이틀 후에 일어난 안골포 해전을 총칭합니다. 이순신 장군이 치른 여덟 번째 해전입니다. 매년 8월마다 한산도에서는 한산도대첩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 장군의 구국정신을 기리고 한산도대첩을 기념하기 위한 통영한산대첩축제가 열립니다.

이 전투가 중요한 이유는 곡창지대인 호남을 지키고, 계속되는 패전으로 사기가 떨어졌던 조선군에게 승리의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는 것 외에도, 일본에 있어서 전쟁의 필수요건인 서해안 물자 보급로를 차단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일본의 대표 장수들이 이끈 정예수군이 크게 패배하자 일본군들은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이후 이순신 장군과의 해전을 피하라는 명령을 내리기까지 했습니다.

한산도대첩에서 이순신 장군은 두 가지 전법을 사용했습니다. 넓은 바다로 적들을 유인해 학의 모양으로 포위한 후 화포를 효율적으로 발사하는 학익진은 방향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판옥선에 유리한 전법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일본의 적선 73척 중 47척이 부서졌고 12척이 나포되었습니다. 나중에 도착한 일본의 후발부대들은 자기편이 한산도에서 대패했다는 것을 알고 안골포의 좁은 지역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학익진을 사용할 수 없음을 알고 차례로 포구에 진입해 공격한 후 돌아 나오는 장사진 전법을 사용해 다시 한번 큰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이 승리가 가능했던 큰 이유는 전투를 치르기 전에 정보를 수집하고 철저히 전략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적군의 단점을 파악하고, 아군의 장점을 최대한 이끌어내 효율적으로 싸울 준비를 한 후, 확실히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후에 전투에 임했던 장군의 모습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무작정 부딪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요즘도 노력은 하지 않고 행운이 오기만을 바라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지피지기면 백전불태, 즉 미리 준비하는 자에게 승리와 행운이 찾아온다고 현재의 우리에게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전투에서 한 가지 더 배웠으면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 앞바다까지 일본 수군을 이끌어내 싸우고, 안골포에서 큰 배만 골라 파괴한 이유는 적이 패했을 때 육지로 올라가 우리 백성을 해칠까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조정에 보고해 인정을 받으려면 한 척의 배라도 더 부수는 것이 유리했을 테지만, 전투에서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는 것보다 우리 백성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자신의 원칙을 따랐습니다. 이렇게 한결같은 마음이 없었다면 많은 백성들이 이순신 장군을 끝까지 따르고 돕지 않았을 것입니다. 간혹 사람들은 성과에 급급해 일을 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세운 규칙을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결과만큼 그 과정도 중요하기 때문에 자신의 원칙을 끝까지 지키는 고집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 1597년 10월 25일(음력 9월 15일)은 명량대첩 기념일입니다. 명량대첩은 세계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절대적인 열세의 상황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거둔 전투입니다. 명량해전은 이순신 장군이 고난의 시기를 보내고 힘겨운 준비과정을 통해 이루어 낸 승리라서 더욱 기억에 남는 것 같습니다.

5년간 조선 수군을 훌륭하게 이끌었던 이순신 장군은 선조 임금이 일본의 거짓정보에 속아서 내린 출전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 당했습니다. 새로 삼도수군 통제사가 된 원균 장군이 칠천량 해전에 나갔다가 150여 척의 판옥선이 파괴되는 커다란 참패를 당하자 선조 임금은 자신의 오판을 인정하고 백의종군 중에 있던 이순신 장군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권율 장군과 함께 육군으로 싸우라는 선조 임금의 명령을 듣고 이순신 장군은 그 유명한 ‘상유십이 미신불사 – 우리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고, 이 보잘것없는 신하가 죽지 않은 이상 싸워 볼 희망이 있습니다’라는 단호한 결의를 보냈습니다. 자신을 부당하게 대했던 것에 대해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임금을 위로하고 설득한 것입니다.

제가 만약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했는데 그 공을 인정받기는커녕 모함을 당하고, 사형에 처해질 뻔 하고,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수모를 당한다면 아마도 이순신 장군처럼 행동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소설가 박경리 선생님이 ‘이순신은 개인의 욕심이나 영광을 위해 싸운 게 아니라 백성의 편안한 삶이 침탈 당한데 대해 항거한 선비다. 그는 무장이 아니면 시인이나 학자가 되었을 것이다. 이순신은 우리 시대가 도달할 인격의 전형이다’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게 확실합니다.

그 이후 이순신 장군은 무거운 책임과 걱정으로 잠을 못 이루고 아픈 와중에도 수군을 다시 모으는 일에 매진했습니다. 나라의 지원을 받을 수 없었던 상황이라 내륙지역을 돌아다니며 군사를 모으고 전쟁에 쓸 화포와 화약을 준비했습니다. 군사를 먹일 식량과 의복들도 조달해야 했습니다. 이 모든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백성들의 절대적인 신임과 존경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명량해전은 133척의 일본 수군을 13척의 배로 막아야 하는 절대열세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조선 수군은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배들은 모두 뒤로 물러났습니다. 이로 인해 한 시간 가까운 시간을 이순신 장군의 배만 혼자 일본군들과 싸웠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지도자의 모습에 감동한 조선 수군은 결국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결국 함께 싸우게 되었습니다. ‘죽기로 싸우면 살 것이요, 살고자 꾀하면 죽는다. 한 사람이 길목을 잘 지키면 족히 천명도 두렵게 한다’는 이순신 장군의 명언이 결코 허튼 말이 아니었습니다.
장군의 용기뿐만 아니라 탁월한 전략 또한 빛을 발했습니다. 폭이 좁고 수심이 낮은 명량 수로 지역에는 일본의 큰 배들이 지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 지역을 선택해 적은 병력으로 유리하게 싸움을 이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적들의 기세가 꺾인 틈을 타 맹공을 퍼부어 31척의 함선이 격파 당하자 일본 수군은 결국 후퇴했습니다. 이 전투의 값진 승리로 인해 꺼져가던 조선의 운명은 또다시 기적적으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강조한 ‘필사즉생, 필생즉사’는 현대의 우리에게도 필요한 정신입니다. 자신의 앞에 닥친 일이 아무리 크고 힘들어 보여도 자신의 능력을 믿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극복할 수 있다는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네 번째, 1598년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은 이순신 장군의 순국 기념일입니다. 이날은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이 일어난 날이기도 하면서 이순신 장군께서 숨을 거두신 날입니다.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사하게 되자 일본군에게 철수 명령이 떨어졌지만, 이순신 장군은 그들을 순순히 돌려보내면 조선을 우습게 여겨 다시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 생각해 ‘한 놈도 살려 돌려보내지 않겠다’는 굳건한 의지로 바닷길을 지켰습니다. 명나라 수군의 느슨한 봉쇄를 틈타 일본의 통신선이 구원을 요청하러 빠져나간 것을 알게 된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협으로 급히 이동했습니다.

새벽에 펼친 기습작전으로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 200여 척을 쳐부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살아남은 일본 수군 100여 척은 잘못해서 관음포에서 들어가 갇히게 되었고 이를 뒤따라온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을 상대로 격렬한 근접 백병전이 벌어졌습니다. 날이 밝아 시야를 확보한 일본 수군이 집중사격하자 이순신 장군은 왼쪽 아래 가슴에 총알을 맞아 생명이 위급한 순간에도 ‘전투가 바야흐로 급하니 나의 죽음을 말하지 말라’고 하시며 아군의 사기가 떨어지는 것을 걱정하셨습니다. 마지막까지 오직 나라와 백성을 위해 거룩한 자기 희생과 헌신의 모습을 보인 이순신 장군의 지도력 덕분에 노량해전은 조선의 승리로 끝마칠 수 있었습니다.

살아서 나라를 지켰지만, 죽어서도 나라와 민족을 지킨 이순신 장군을 본받아 내 이웃과 내 나라, 그리고 세계에 이바지하는 훌륭한 시민이 되는 것 – 그것이 현재의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가 아닐까 합니다. 저 또한 이순신 장군의 모습을 닮아가고 싶습니다. 세계 어느 곳에 살더라도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가지고 열심히 자신을 발전시키도록 노력하겠습니다.